조선 제4대 왕에 오른 세종의 나이는 당시 스물 둘.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했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에“상왕의 뜻이 이러하니” 또는 “상왕께 아뢰어보겠소.”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테스트를 받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2호학의 군주,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했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의 말이 전할 정도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은 그저 경전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하고는 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쭉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다.
3조선의 제도와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으며,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뒤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4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늘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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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능인 영릉.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hendry/185985727>
사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5정신을 따라오지 못한 육체의 한계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달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1440년부터는 독서도 거의 못했던 듯하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대왕1397~1450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1.세종대왕의 업적
최초의 공중 해시계 앙부일구(보물 845호)
훈민정음창제-
천문학의 발전-
일성정시의(별이 자리를 옮기는데 따라서 밤 시각도 알게 만든 시계)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옥루 등)
측우기 (세계 최초의 우량계)
조선통보 주조
김종서의 6진개척과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으며, 악기를 개조하였고, 음악을 발달시켰음
구리로 된 『 갑인자 』라는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많은 책을 남겼음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업에 관한책 '농사직설' 편찬
우리 나라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편찬
1445년 '치평요람'완성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이고 같이만듬
현대 한국어의 상식으로는 알아 듣기 어려운 표현들로 서술된 탓에... 말 그대로 '못 알아 들을 만한'
내용이죠.
고유 언어는 있지만, 고유 문자가 없던 한반도인들은... '한자'의 뜻을 차용하거나.. 그 한자의 뜻과는 상관
없이 '음'만 빌리거나 해서 한국어를 기록해 왔습니다.
'돌쇠'라는 사람의 이름을 '石金(돌 석, 쇠 금)'이라고 쓰고 '석금'이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돌쇠'라고
읽는다든지....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突釗(부딪힐 돌, 힘쓸 쇠) 라고 표기하여 '돌쇠'라고 읽는다든지
그런 식이었죠...
그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 대왕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하여 '우리만의 글'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세종 대왕께서 직접 밝힌 '훈민정음' 창제 이유의 내용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훈민정음은 그 한자에 나타나 있듯이 글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의미입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 민족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표기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말을 있는 그대로 적을 수 없음은 물론 충분히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밝히기도 어렵고, 익히기도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문자가 요구되었는데,
세종대왕은 남의 나라 글자인 한문을 빌려 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이 만들어진 이유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말은 그 발음이나 표기가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 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불편을 없애고자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백성은 누구나 쉽게 배워 익혀서 일상 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한글이 위대하고 세계적으로 언어학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백성의 불편을 해소시키고자
왕이 나서서 문자를 만든 사례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 문자가 아주 과학적이며 세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민족의 언어를 거의 99% 표기해 놓을 수 있는 우수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수많은 종족들의 언어 문화를 지속시켜 갈 수 있는 수단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예로 인도네시아의 바우바우시에 살고
있는 찌아짜아족이 한글을 익혀 사용해 본 결과가 세계에 널리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의 이론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制字) 및 그 결합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이론인 삼극지의(三極之義)와 이기지묘(二氣之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극은 천·지·인 삼재를 말하고, 이기(二氣)는 음(陰)·양(陽)을 말한다. 성리학적으로 이 삼재와 이기로 우주일체의 사상(事象)을 주재하는 기본이념으로 이해되고, 이 삼재와 음양을 떠나서는 우주일체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성음(聲音)도 그것이 개념을 표상(表象)하는 그릇이므로, 근본적으로 삼재와 음양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말소리의 체계는 삼재·음양의 체계와 반드시 합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언어관(言語觀)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그 음(音)의 분류에 있어서나 제자 원리에 있어서 그 철학적 이론은 모두 이러한 언어관에 입각하고 있다. 성리학에 따르면 모든 사상은 음양(陰陽)·오행(五行)·방위(方位)의 수(數)가 있으므로 음의 분류도 오행의 수에 맞추었다. 오행 ·방위, 그리고 초성에 있어서의 춘하추동,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중성에 있어서의 천·지·인, 일·이·삼…(一 二 三…)의 수와 같은 것은 모두 성리학적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음의 특징은 음성적 특징과 성리학적 특징의 양면에서 기술되어 있다.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목적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 자체에도 나타나 있지만 세종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본문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문은 다음과 같다.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일용(日用)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첫째, 한국어와 문자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하자는 데 그 창제 동기와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자(漢字)는 원래 중국어에 의하여 발생, 발달해온 글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국어를 표기하기에 합당한 글자이지, 구조적으로나 음운체계를 달리하는 한국어의 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한국어의 구조와 음운체계에 맞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어, 우리의 음운과 의사를 그대로 표기할 수 있을 때 한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족문화를 육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모든 백성에게 문자 이용의 혜택을 균등하게 입게 하자는 데 동기와 목적이 있었다. 한자의 체계는 그 구조·형식 때문에 기술적(記述的)으로 대단히 복잡하고 특수한 훈련이나 기술(技術)이 없으면 익히기 매우 힘들고 또 그것을 완전히 익히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국 자체에서조차 이 한자를 완전히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소수의 지식·귀족계급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특히 한국의 경우에도 그것이 귀족·지배 계급의 문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백성을 위한 서민의 문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자는 문화의 소산이며 문화의 매개체이다. 문화는 전체 백성의 것이지 결코 일부 지배계급의 특권적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한 세종의 의도이며 이상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이상 실현은 문자생활로 그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도 그 글에서 "문자가 언어와 불일치하기 때문에 학자와 서생(書生)은 그 뜻을 밝히기가 어렵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가 어렵다"고 개탄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연구나 국가의 정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셋째, 선진문화 섭취에 도움을 주자는 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동시에 《동국정운》의 편찬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역훈(譯訓)을 시작하였다. 전자는 한국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국음의 표준을 정하자는 데 있었다. 이 《동국정운》의 편찬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난 것임을 뜻한다. 《홍무정운》을 역훈하게 한 것도 빈번한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어 습득이 불가피한 만큼 중국어에 대한 표준적인 운서를 정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에 수록된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반절식(反切式)으로도 불충분하고 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과 같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제정의 경과〉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본의 발견〉 반포 당시의 해례가 붙은 《훈민정음》 원본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40년 7월에 경북 안동(安東)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은 첫 장과 둘째 장이 떨어져 나간 것(세종 御製 서문과 例義의 일부)을 복원하였다. 그 전까지는 세종 어제 서문과 예의만이 전해 왔으며,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한문 <실록본>과 《월인석보》 권두에 수록된 <언해본(諺解本)> 초간본으로 추정되는 판본이 최근 발견되어 서강대학에 보존되어 있고, 박승빈(朴勝彬)이 간수한 단행판각본(單行板刻本)으로 된 언해본, 그리고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있는 사본인 <궁내성본>,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가 간수하고 있는 사본인 <가나자와본>이 있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사망하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의 전기를 엮게 하였는데, 《석가보(釋迦譜)》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 등에서 뽑아 모은 글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 1447년(세종 29)에 완성한 것을 1449년(세종 31)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언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경 언해서(諺解書)와는 달리 문장이 매우 유려하여 당시 국문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권6·9·13·19의 초간본 4책(보물 523),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23·24의 초간본 2책, 호암미술관 소장의 복각된 중간본 권11 1책, 1979년 아주대학교 천병식(千炳植) 교수가 발견한 복각된 중간본 권3 1책 등이 있다. 권6·9·13·19는 1955∼1957년에 한글학회에서 《한글》지(誌) 통권(通卷) 111∼121호의 부록으로 15회에 걸쳐 영인하여 실었고, 권11도 1959년에 《어문학자료총간(語文學資料叢刊)》 제1집으로 영인·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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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밝(? : 밝다)'에 해당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발(發), 맥(貊), 또는 단(檀) 등으로 나나타고 있는데, 이 말은 샤먼을 의미하는 박시(Baqsi)와 연계되어있다. 따라서 發조선이란 貊조선, 檀君조선이라는 말과도 큰 차이가 없다. 다만 檀은 박달나무와는 큰 상관이 없고 '밝달' 또는 '배달(태양이 비치는산 또는 태양족)'을 표현하는 말이다. "bright, to shine"의 의미로 Proto 알타이는 [먈릭 mi?ali(-k`V)]이고 투르크어는 [밝 bAlk] 몽골어는 [멜 mel] 만주 퉁구스어는 [먀ㄹmia(l)]이고 한국어에서는 [맑다 ma??rk]에서의 '맑'과 같다. 결국 '맥'과 '밝'은 서로 호환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http://apr6lawclerkprogram4.blogspot.com "역사를알아야 나라가산다". 초.중.고(2년한글언어Court Interpreter.2년AAS FashionDesign한복만들기,*SAT시험) 대학교4년B.Ed언어선생.서울교육청원어민교사2년LoanDeferrment.5년미국부대언어교사.*GRE시험 2년대학원M.A.SchoolCounselor.*LSAT시험3년법대.*BarExam시험통과후곧IRS EnrolledAgent20년공무원. Apologizing in advance for mispelled grammatical errors! Consider it as a printable worksheet for those studying to improve English Grammar.
6단계의 무료 추천학습
- 6단계학습자료
- (3of6)GED 고1. 고2. 고3. 고4. ( 9학년Freshman, 10학년Sophomore, 11학년Junior, 12학년Senior)
- (6of6) LSAT시험/J.D. (Judicial Doctorate)변호사 대학원3년 Public Service Tax Law/BAR Exam/ 20년 공무원 IRS Enrolled Agent
- (5of6)GRE 시험/2년대학원 M.Ed (Masters in School Counseling).
- (4of6)SAT시험/FAFSA Stafford Loan/ 선생4년대학교: B.Ed. (Bachelors in Education 영어한글 교사).
- (1of6)유치원 -초1-초2-초3-초4-초5
- 한국3.1 프랑스
- 고조선2333BC -1065BC 고조선의 유대인
- 한글 1443년
- Biography: ㅇ ㅈ ㅊ ㅋ
- Biography; ㅁ ㅂ ㅅ
- Biography: ㄱ ㄴ ㄷ ㄹ
- Biography: ㅌ ㅍ ㅎ
- Global Timeline (B.C. - A.D.) Wikipedia reference...
- V W X Y Z ( Academic Terms)
- R S T U ( Academic Terms)
- O P Q ( Academic terms)
- K L M (Academic terms)
- G H I J ( Academic terms)
- D-E -F ( Academic Terms)
- A B C (Academic Terms defined)
- (2of6)중6. 중7. 중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