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大倧敎)는 한민족의 교조로 여겨지는 단군을 신봉하는 신흥 종교이다. 창시자는 나철로 초기에는 '단군교'(檀君敎)라고도 불렸다.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 강점기였던 탓에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1] 2010년 현재 전국에 약 3,766명의 신도가 있으며 시교당(詩敎堂, 대종교의 교회)과 수도원 20여곳 등의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대종교의 4대 경절로 중광절 · 어천절 · 가경절 ·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다.
대종교에 따르면, 중광조 나철이 1905년 서대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 도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삼일신고(三一神誥)〉와〈신사기(神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에서 두일백(杜一白) 도인으로부터〈단군교포명서〉를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종교를 일으켰다고 한다.[2] 나철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4차에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1월 15일 동지 오기호, 이기, 김윤식, 유근 등 10명과 함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으로써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1]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1] 정훈모(鄭薰模)는 1910년 7월 30일에 대종교로 명칭을 변경하자 ‘단군교’의 이름을 고수하며 분파해 나갔다.
일제가 1915년 10월 《총독부령 83호 종교통제안》을 발표함으로써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의 지린 성 허룽 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서일, 박찬익 등과 함께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고, 《단조사고》《신단실기》, 《신단민사》 등의 책을 편찬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성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다.[3]
1916년 나철이 죽자 대종교의 역사서라 할 수 있는 김교헌이 2대 교주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1]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대 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1948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量)·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을 가지고 있었다.[1]
나철은 비밀 결사 조직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으로 알려진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의 다섯 인물의 암살을 시도했다. 또한 그들을 죽이자는 참간장(斬奸狀)을 돌리기도 했으며, 일본을 방문해 일본 궁성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대종교 중광 60년사에 따르면 나철은 이 사건 때문에 정부 전복 혐의로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는데, 1909년 정월 15일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 서울 북부 재동(齋洞) 취운정(翠雲亭) 아래에서 60여 명의 동지들과 단군교를 새롭게 열면서 이날을 중광절(重光節)로 삼았다. 중광이란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중흥한다는 의미였다. 망국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이 단군교에 속속 입교했지만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은 1910년 8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4]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이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는 등 단군교 교단의 수뇌부 중 일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5]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는 정훈모를 중심으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6]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어졌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7] [8]
제1대 대종교 도사교
1909년 1월 15일 - 1916년 8월 15일
나철(羅喆, 1863년[1] 12월 2일 ~ 1916년 8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2]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89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 아버지는 유학 나용집(羅龍集),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3]
전라남도 보성 출신[4] [5] 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6]하고 이어 1891년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후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저서에 대종교 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맏아들 나정련, 둘째 아들 나정문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중광절(重光節,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 나철이 순교한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3]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책으로 1909년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는데 1914년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세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7]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나철은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 유언대로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신단실기『삼일신고
함께 보기편집
대종교김교헌윤세복신단실기삼일신고
편집
나두영(나철의 본명)의 문과방목에는 생년이 1859년으로 기재되어있다.한국언론진흥재단, 황성신문(皇城新聞) - 1900년 05월 03일 (97호) ~ 05월 05일 (99호) / 廣告 : 前注書羅斗永名改以璌永辱知君子僉諒 / 1900년에 나두영이 나인영으로 개명했음을 알 수있으며,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기사에서는 나인영을 羅'璌'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1971년)나철의 출신지는 전남 보성이지만,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는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었고, 1900년 나인영으로 개명할 당시에는 전북 전주에 살았다.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나두영의 문과방목,《종교학대사전》, 대종교,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
http://m.terms.naver.com/tlist/list.nhn?listId=1293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인물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를 세운 단군왕검
고조선의 왕이 된 위만
“꿈은 이루어진다.”를 몸소 실천한 주몽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한 을파소
땅따먹기의 챔피언 광개토대왕
천리장성을 쌓은 연개소문
가자, 남으로! 장수왕
나는 왕만 78년을 했고 97세에 죽었어요. 그러니 장수왕은 내 이름으로 아주 적격이에요. 내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남진 정책이에요. 남진 정책이 뭐냐고요? 나한테 물어보면 쪽팔리니, 장콩샘과 함께 나의 행적을 더듬어 보도록 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남진 정책을 펼쳤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장수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아버지.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발전할 수 있게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개로왕 백제의 왕. 장수왕의 계략에 넘어가 호화 생활을 하다가 수도인 한성을 고구려 군사들에게 내주고, 살해되었다.
도림 장수왕이 백제에 파견한 스파이 승려. 고구려 군사들이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손쉽게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413년, 땅따먹기의 챔피언이자 위대한 지도자였던 광개토대왕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대왕의 맏아들 거련이었는데, 그는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제국을 물려받아 영토를 더욱 확장시키며 훗날 장수왕으로 불렸어요.
장수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정하고 나라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짜기 시작했어요. 연호는 왕의 통치 기간을 표시하는 호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중국에 세워진 나라의 연호를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장수왕이 건흥이란 독자 연호를 사용하여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나타내며, 고구려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했어요.
이름만큼 오래 산 임금님
‘태조’, ‘정종’, ‘태종’과 같은 왕호들을 ‘묘호’라고 해요. 이 이름들은 왕이 죽은 이후에 생전에 쌓아 놓은 업적들을 바탕으로 신하들이 논의하여 정했어요.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업적보다는 무덤이 있는 곳의 이름을 묘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고국원왕은 고국원이란 땅에 무덤이 있었기에, 미천왕은 미천 옆에 무덤을 만들었기에, 소수림왕은 소수림 지역에 무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하지만 장수왕은 특이하게도 오래 살았다고 해서 ‘길 장(長)’에 ‘목숨 수(壽)’를 써서 장수왕이라 했어요. 어찌 보면 매우 독특하게 지은 개성 있는 이름이에요. 여기서 잠깐! 장수왕은 정말 이름만큼이나 오래 살았을까요? 그런 것 같다고요? 예, 맞습니다. 장수왕은 97세에 세상을 하직했고, 왕으로 재위한 기간만도 78년이나 돼요.
고구려를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만든 장수왕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북쪽 지역으로 아주 넓게 영토를 확장해 놓았기 때문에 위쪽으로는 더 이상 영토를 넓히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는 서북쪽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 세력과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구사했어요. 장수왕의 이 정책은 기존의 고구려 외교 정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에요.
고구려는 주몽왕이 나라를 세운 이후, 중국 및 북방 세력과 지속적인 싸움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시킨 나라예요.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이나 북방 세력과 치열하게 다투면서 성장했어요. 그런데 장수왕은 기존의 정책과는 다르게 중국 세력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모든 힘을 남쪽에 있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 데 사용하려 했어요. 그의 이러한 정책을 ‘남진 정책’, ‘남하 정책’이라 해요.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했어요.
평양성은 국내성보다 터가 넓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국내성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귀족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어요. 여기에 백제, 신라의 국경선과 근접한 지역이어서 남진 정책을 추진하기에도 적격인 땅이었어요. 따라서 평양성으로의 도읍지 이전은 일석 삼조의 효과를 가진 효율성 만점의 결정이었어요.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동요하기 시작했어요.
5세기의 고구려 무사들을 상대로 백제나 신라군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결국 두 나라는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433)을 체결했어요. 하지만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군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한다고 해서 물리칠 수 있는 그런 군대가 아니었어요. 464년에 고구려군 100여 명이 남쪽의 국경 지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장수왕은 바로 대응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468년에 신라의 실직성(현재 강원도 삼척)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475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함과 동시에 개로왕을 붙잡아 죽여 버렸어요. 이로 인해 백제는 수도를 웅진(현재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어요. 또한 481년에는 신라로부터 일곱 개 성을 빼앗았어요. 이러한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국경선은 아산만(牙山灣)에서 죽령(竹嶺)에 이르게 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힘은 크게 위축되었어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마을에 가면 예전에 마을 주민들이 빨래판으로 쓰던 비석이 하나 서 있어요. 이 비석을 ‘중원 고구려비’라고 해요. 여기에는 신라 땅이었던 남한강 지역이고구려 땅으로 변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서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성공리에 추진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지요.
.............
"나철" 분으로 *단군교 ( 대종교; 제사를 세종왕때도 평양에서 조선시대때 3세 단군 ( 고조선 만듬)/2세는 하늘 위 Ancient Siberia 하늘위에서 아버지허락받고 백두산으로 내려왔음. 찾아와서 인간이 대고싶어하는 호랑이 와 곰이 있어서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100일동안 햇빛없이 쑥하고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된다하였으나 ; 호랑이는 급한성격탔에 아직도 호랑이고 ( India Tiger 이나 Siberian Tiger);
성공한 곰은 21일만에 여자가됐는데 사람들이 관심을주지않아서 빌고빌어서 2세인 환웅 이 하루밤재워서 아들을 가저; 그 아들이 고조선을 만든 단군임.
단군이 반 내려온 신의 아들이며 그리고 반의 곰( Siberia-Prussia-Russian Bear)이 쑥과 마늘을 햇빛없는 21일을 100일의 요권으로 여자가돼서 결혼을 못하자 다시 인간으로 만들게해준 환웅을 하루밤 자서 가진 단군의 곰웅녀.
나철(羅喆, 1863년[1] 12월 2일 ~ 1916년 8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2]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89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 아버지는 유학 나용집(羅龍集),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3]
전라남도 보성 출신[4] [5] 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6]하고 이어 1891년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후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 대종교" ( 한민족; 단군으로 탄생한 고조선 이 한반도의 탄생이다))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저서에 대종교 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맏아들 나정련, 둘째 아들 나정문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중광절(重光節,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 나철이 순교한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3]
http://apr6lawclerkprogram4.blogspot.com "역사를알아야 나라가산다". 초.중.고(2년한글언어Court Interpreter.2년AAS FashionDesign한복만들기,*SAT시험) 대학교4년B.Ed언어선생.서울교육청원어민교사2년LoanDeferrment.5년미국부대언어교사.*GRE시험 2년대학원M.A.SchoolCounselor.*LSAT시험3년법대.*BarExam시험통과후곧IRS EnrolledAgent20년공무원. Apologizing in advance for mispelled grammatical errors! Consider it as a printable worksheet for those studying to improve English Grammar.
6단계의 무료 추천학습
- 6단계학습자료
- (3of6)GED 고1. 고2. 고3. 고4. ( 9학년Freshman, 10학년Sophomore, 11학년Junior, 12학년Senior)
- (6of6) LSAT시험/J.D. (Judicial Doctorate)변호사 대학원3년 Public Service Tax Law/BAR Exam/ 20년 공무원 IRS Enrolled Agent
- (5of6)GRE 시험/2년대학원 M.Ed (Masters in School Counseling).
- (4of6)SAT시험/FAFSA Stafford Loan/ 선생4년대학교: B.Ed. (Bachelors in Education 영어한글 교사).
- (1of6)유치원 -초1-초2-초3-초4-초5
- 한국3.1 프랑스
- 고조선2333BC -1065BC 고조선의 유대인
- 한글 1443년
- Biography: ㅇ ㅈ ㅊ ㅋ
- Biography; ㅁ ㅂ ㅅ
- Biography: ㄱ ㄴ ㄷ ㄹ
- Biography: ㅌ ㅍ ㅎ
- Global Timeline (B.C. - A.D.) Wikipedia reference...
- V W X Y Z ( Academic Terms)
- R S T U ( Academic Terms)
- O P Q ( Academic terms)
- K L M (Academic terms)
- G H I J ( Academic terms)
- D-E -F ( Academic Terms)
- A B C (Academic Terms defined)
- (2of6)중6. 중7. 중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