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 ㅇ ㅈ ㅊ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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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ng  those Indonesians fighting for their country's freedom was a Korean 양칠성 whom himself forced by Meiji Jap to work as Meiji Puppet or place bis family in death's wrath by Meiji Jap enslaving Korean Peninsula the same perios Hitler from Austria took hild of Nazi Aryan-India-Iran hold of Europe.

Disturbing that seventy something uear old Jap Woman taking Korean Money to live richer and to travel and get credit for reporting on Meiji Jap sins while same POWs and THOSE ENSLAVED BY MEIJI JAP LIVE IN POVERTY AND POOR HOUSING/POOR HEALTH.)



Kbs 파노라마 14ㅣ0801 전쟁과일본 전범이 된 조선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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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

전북 완주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베오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경의 외경 중 '마카베오 상,하'에 나와 있다.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누카를 통해 이 사건을 기념한다. 하지만 B.C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AD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제우스(그리스어: Ζεύς, Ze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신(主神)이다. 로마 신화의 유피테르와 동일시된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아들이며 포세이돈,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번개와 독수리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언어유대어, 히브리어, 이디시어, 라디노어 외유대교아랍인

유대인(히브리어: יהודי 유대인; Yehudim[10]) 또는 유다인 혹은 유대인(猶大人)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유대교의 법률인 《하라카》의 정의에 따르면,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민족적 의미) 유대교를 따르는(종교적 의미) 사람을 유대인이라 한다. 서아시아의 가나안에서 근원한다. 유대인의 민족, 문화, 종교 및 신앙은 서로 밀착된 강한 관계를 보이며,유대교는 유대인 간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전통종교인 것이다.[11][12][13] 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1597년 임진왜란 6년,
오랜 전쟁으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
무서운 속도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누명을 쓰고 파면 당했던 이순신 장군(최민식)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를 상실한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 뿐.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마저 불타고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류승룡)가 왜군 수장으로 나서자
조선은 더욱 술렁인다.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가 속속 집결하고
압도적인 수의 열세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바다를 향해 나서는데…!

12척의 조선 對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스어는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자 신약성서 번역자인 에라스무스를 기점으로 고대 그리스어와 현대 그리스어로 나눈다. 고대 그리스어는 악센트와 방점을 찍으며, 글자의 음가와 문법, 단어 의미, 사용방법이 현대 그리스어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인(고대 그리스어: Έλλας 헬라스[*])이라 불렀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어를 헬라스어또는 헬라어라고도 하며, 헬라어의 한자 음역인 희랍어(希臘語)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어권에서는 신약성서를 쓴 언어를 헬라어라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까지 헬레니즘 사회가 구축되어 헬레니즘 권역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 일반적 헬라어였던 코이네 헬라어를 지칭한다.

기독교'(Christianity)라는 말은 한국에서 개신교(Protestant)만을 일컫는 말로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기독교'는 주요 분파인 성공회, 동방정교회, 개신교회 등과 아프리카 교회를 포함해 야훼 하느님(개신교의 경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는 모든 교회들을 뜻한다. 이들 교회들은 교단 분열로 인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소모전으로 전교에 지장을 받기도 했지만,교의가 아닌 복음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천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다.

1장 마케도니아의 임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 활동을 펼쳐 페르시아 제국을 정벌하고 온 세상의 임금들을 죽여 넓은 영토와 제국을 확보한다. 그러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제국은 그의 부하 장수들에 의해 나뉘고 그들을 세상을 온 악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이민족의 풍습을 따르며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쳐 정복했다. 또한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박해했다.

2장 이때 마카베오의 아버지이자 사제인 마타티아스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이민족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임금의 신하를 죽이고 제단을 헐어버린 뒤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 마티타아스는 산에서 그를 쫓아오는 군대에 맞서 투쟁을 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이민족들의 제단을 헐고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3장 마타티아스는 얼마 후 유언을 남기고 죽고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그의 뒤를 잇는다. 유다 마카베오는 벳 호른에서 아폴로니우스가 이끄는 이민족들과 아시리아인들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안티오코스는 페르시아 지역을 떠나며 왕족인 리시아스를 섭정으로 임명한다.

리시아스는 도리메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와 니카노르, 고르기아스를 부하로 뽑아 유대인들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그러나 온 유대인들이 단결하고 시리아 군대와 필리시테인 지방의 있던 군대도 유대인들과 힘을 합쳐 미츠파에 모인다.

4장 미츠파에 모인 유대인들은 엠마오에서 고르기아스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다. 이 소식을 들은 리시아스는 크게 낙담하고 이듬해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보병 6만과 기병 5000을 소집해이두매아 지역으로 진격했으나 크게 패배하여 안티오키아로 퇴각하고 만다.

그리고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은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봉헌했다.

5장 제단이 복구되고 성소가 봉헌되었다는 소식을 듣은 이민족들은 유대인들을 공격했으나 아크라바테네에서 이두매인들은 크게 패하고 암몬인들 역시 정벌당한다. 그러자 이민족들은 자기 영토 안의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길앗과 갈릴래아 지역의 유대인들이 크게 핍박을 받았다.

그러자 시몬이 나서 함께 갈릴래아로 가서 이민족들과 맞서 싸웠고 병사 3000명을 쓰러뜨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거두었다. 마카베오와 그의 동생 요나단은 요르단 강을 건너 진군해 여러 이민족들과 티모테오스를 무찔렀다. 하지만 즈카르야의 아들 요셉과 아자르야는 과신을 하며 얌니아로 진군하다가 고르기아스에게 크게 패배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매아와 필리시테인 지역에서 또 다시 대승을 거두고 많은 전리품들을 얻었다.

6장 내륙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페르시아 지역의 엘리마이스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바빌론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티오코스는 큰 충격을 받았고 결국 화병이 나 죽고 만다. 안티오코스가 죽자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가 뒤를 잇는다.

예루살렘에서는 성채에 있는 자들이 이민족들을 지원하며 못된 짓들을 하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채를 포위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가 나섰으나 벳 즈카르야 전투에서 유대인들에게 크게 패하고 벳 추르가 점령당했으며 시온이 포위되었다.

결국 안티오코스는 화친을 제의했고 리시아스는 급히 철군하였다.

7장 한편 셀레우코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로마에서 빠져나와 리시아스와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를 살해하고 데메트리오스 1세로 왕위에 올랐다. 데메트리오스는 자신의 벗 바키데스를 부하로 뽑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사악한 대사제 알키모스를 보내 유대 지역을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도중 알키모스가 대사제직에서 해임당하려는 위기를 맞자 그 사이에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 전역을 약탈하고 큰 피해를 입힌다. 한편 옛 리시아스의 부하였던 니카노르는 데메트리오스에게로 귀화해 시리아 군대와 함께 카파르살라마 부근에서 유대인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벳 호론 지역에서 크게 패하고 니카노르는 전사했다.

8장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의 명성을 듣고 아코츠의 손자이자 요한의 아들 에우폴레모스와 엘아자르의 아들 야손을 뽑아 로마로 보내 우호 동맹을 맺게 하는데 유대와 로마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9장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데메트리오스 1세가 니카노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바키데스, 알키모스와 함께 유대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행군을 하며 아르벨라의 매살롯에 진을 치고 그곳을 페허로 만들어 버렸고 군대 수에 놀란 유대군들을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800명의 군사만 남자 유다 마카베오는 엘리사에 진을 치고 최후의 전투를 감행해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다. 이로써 유대군은 다 흩어지고 동생 요나단과 저항 지도자 시몬만이 살아남아 마카베오의 장례를 치렀다.

마카베오가 죽자 동생 요나단이 뒤를 잇게 되었다. 요나단은 군대를 재정비하여 아스파르 못 가에 진을 치고 싸워 바키데스를 무찔렀다. 바키데스는 도망쳐서 예리코와 예루살렘, 벳 호론, 베텔, 팀나 등 유대의 주요 성읍 요새들을 튼튼히 하고 수비했다.

이후 알키모스는 죽고 바키데스는 벳 바시에서 요나단과 시몬에게 다시 크게 패해 유대를 떠나고 말았다.

10장 쫓겨났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전 왕 안티오코스 에우파토르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에피파네스는 반란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해 그곳을 점령한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는 군대를 보내고 요나단이 알렉산드로스와 화친을 맺기 전에 먼저 화친을 맺자는 작전을 세웠다.

또한 데메트리오스는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기까지 했으나 알렉산드로스와 전투 중 전사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라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미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딸 클레오파트라와 혼인을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요나단과 맹약을 맺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의 잔당이자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는 크레타 섬에서 나와 아폴로니우스를 보낸다. 자신의 영토를 지나게 해달라는 아폴로니우스의 서신을 받은 요나단은 분노해 시몬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뽑아 예루살렘에서 나와 아스돗에서 결전을 벌였고 아폴로니우스는 크게 패했으며 알렉산드로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요나단을 더욱 영예롭게 하고 많은 선물을 보낸다.

11장 아폴로니우스가 패배하자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는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킬리키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전사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도 3일 뒤 요새에서 사망한다. 그의 부하 장수들도 그곳 주민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가 데메트리오스 2세로 즉위한다.

요나단은 이를 경계해 데메트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영토를 세 구역으로 나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의 휘하 장수 디오도토스 트리폰은 흉계를 꾸며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디오니수스를 아라비아인 이말쿠에에게로 보낸다.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반란이 일어나자 데메트리오스를 도와 안티오키아로 용사 3000명을 보내 승리하지만 데메트리오스는 요나단이 자신과 한 약속을 어겨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자 요나단은 디오도토스 트리폰과 동맹을 맺고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데메트리오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12장 요나단은 로마와 맺은 동맹을 강화하고 스파르타인들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요나단과 시몬은 하맛 지방에서 다시 한번 데메트리오스를 무찌르고 승리한다. 이때 트리폰이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를 죽이고 왕이 되려 하자 요나단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트리폰을 공격한다.

그러자 트리폰은 요나단을 후히 대접하고 군사를 돌려보내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트리폰의 흉계였고 요나단은 그곳 주민들에게 붙잡혔고 그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이 살해당한다. 트리폰은 군대를 보내 남은 요나단의 군사들을 전멸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패했다.

13장 요나단이 사로잡히자 그의 형 시몬이 뒤를 이었고 마침내 요나단은 트리폰에게 살해당했다.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디오도토스 트리폰이 데메트리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안티오코스 디오니수스를 안티오코스 6세로 왕위에 올려 모시다가 도리어 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14장 시몬은 쫓겨난 데메트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트리폰에 맞서 가자라에서 진을 치고 전투 끝에 점령하였고 예루살렘 성채에서는 악한 무리들을 쫓아냈다. 그러다 데메트리오스가 트리폰과 싸우다가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왕 아르사케스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시몬은 로마와 스파르타와 맺은 동맹을 재확인하고 부흥을 꾀한다.

15장 안티오코스 6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시데테스는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트리폰을 공격한다. 시몬은 안티오코스와 동맹을 맺고 트리폰과 싸우려 했으나 안티오코스는 시몬을 배반하고 말았다. 트리폰은 배를 타고 오르토시아로 달아나고 안티오코스 시데테스가 안티오코스 7세로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코스는 켄데배오스를 해안 지역 수장으로 임명하고 유대를 침공하도록 한다. 켄데배오스는 얌니아로 가 물건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시몬은 아들 유다, 요한과 켄데배오스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16장 그러나 그 무렵 아부보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예리코 평야에서 장수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교만해져 시몬과 아들들을 없앨 흉계를 꾸몄다. 시몬은 자기 아들 마타티아스와 유다를 데리고 예리코로 내렸갔다. 기회를 였보던 프톨레마이오스는 흉계를 써서 시몬은 술에 취하게 만든 뒤 덮쳐 시몬과 그의 아들들을 살해하였다.

그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사실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7세에게 알려 군사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시몬의 남은 아들 요한을 죽이려고 가자라로 군대를 보냈다.

요한은 이에 깜짝 놀라 자기들을 죽이러 온 병사들을 미리 알고 그들을 죽였다. 이를 끝으로 마카베오기 상권의 기록은 마무리된다.

언어유대어, 히브리어, 이디시어, 라디노어 외유대교아랍인

유대인(히브리어: יהודי 유대인; Yehudim[10]) 또는 유다인 혹은 유대인(猶大人)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유대교의 법률인 《하라카》의 정의에 따르면,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민족적 의미) 유대교를 따르는(종교적 의미) 사람을 유대인이라 한다. 서아시아의 가나안에서 근원한다. 유대인의 민족, 문화, 종교 및 신앙은 서로 밀착된 강한 관계를 보이며,유대교는 유대인 간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전통종교인 것이다.[11][12][13] 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대한민국

해방기 이전의 경우는 전혀 없었으나 해방 직후 미미하던 대한민국의 포경수술 시행률은 계속 증가하여 2000년에는 6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3] 이 수치는 40대 이하의 한국전쟁 이후 세대 및 저연령층 남성층으로 한정할 때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높은 포경수술 시행률은 주로 미국의 영향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출처 필요]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만연하였기 때문에 포경수술 또한 자연히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세계에서 포경수술 비율이 높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기타, 이스라엘과 아랍권, 북아프리카에서는 종교적인 이유(할례)가 이들 국가의 포경수술 비율이 높은 원인이다.[출처 필요]

반면, 유럽과 일본, 비 이슬람교 아프리카국가, 비 이슬람교 아시아국가, 중남미 등에서는 매우 적다. 미국을 제외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다른 앵글로색슨계 국가들도 상대적으로 시술률이 낮다.(참고로 일본도 포경수술을 한 인구는 0.9%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만 14~15세 때 강제적으로 행해진다. 주로 위생문제를 이유로 아동기에 포경수술이 널리 유행하였는데, 현재는 포경수술 시술에 대해 비판적, 회의적 시선이 많아졌다. 위생적인 이유로 포경수술을 해야만 했을 때에는 대한민국의 위생적인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그러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위생을 위해 포경수술을 한다는 상식은 잘못된 것이며 이러한 국가는 대한민국뿐이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샤워와 목욕을 자주 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청결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절대다수의 남성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동적으로 포피가 귀두에서 젖혀지므로 포경수술은 필요하지 않다. 과거 한국에서는 무조건 포경수술을 권장하였지만 현재는 음경에 이상이 없는데 행해지는 포경수술은 잘못된 행동이라는 의견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남성 인권유린 사례다. 포경수술 시술 뒤에 각질화 현상, 피부암 등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한민국과 필리핀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포경수술 비율이 높으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포경수술 비율이 높다.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유아의 할례(중앙아시아, 1870년작)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알바니아 이집트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쿠웨이트 레바논 리비아 시리아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아랍에미리트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몰디브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카자흐스탄 카타르 요르단 오만 키르기스스탄

위 국가의 대부분은, 국민들을 기준으로 이슬람교나 유대교도의 비율이 지극히 높다.

아프리카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알제리 가나 기니 모로코 니제르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토고 튀니지 베냉 카메룬 차드 지부티 가봉 감비아 마다가스카르 말리 모리타니 케냐 콩고 공화국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수단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는 이슬람교 비율이 높으며, 성인식으로 할례를 행하는 나라도 있다.

아메리카 미국

유아 포경수술 반대운동(미국)

미국에서는 종교적 이유가 아닌, 위생상의 이유와 어린이, 청소년의 자위행위를 막는다는 이유로19세기 말로부터 포경수술이 이루어졌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성병과 음경암 등의 예방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보급되었다. 또 의료종사자 가운데 할례를 하는 종교 (주로 유대교)를 믿는 이들이 많아서 포피절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정도가 덜한 것도 한 원인이다.

1990년대까지 많은 신생아 남아는 출생 직후에 포경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위생적으로 포경수술의 필요성이 낮아지고, 수술이 갓난아기에게는 높은 위험부담인 동시에 비인도적이라는 의견이 거세지면서 1998년에 소아과학회에서 포경수술을 권하지 않는 가이드라인이 제출되었다. 이후에 포경수술을 받는 신생아의 비율이 미국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21세기 현재는 약 60%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또, 신체 통일성 및 자기 결정권 추구라는 측면에서 태어날 때 본인의지와 관계없이 멋대로 하게된 포경수술을 복원 수술을 통해 자연 성기로 돌아가자는 사람도 적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남성주의자인 워렌 파렐(en:Warren Farrell)은 남아 할례강제를 남성차별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경 ~ 기원전 425년경)의 "역사" 내용 중 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성기를 타고난 그대로 두는데, 이집트인은 할례를 한다. 전 세계에서 콜키스인과 이집트인과 에티오피아인만이 예로부터 할례를 행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유대교

창세기 17장 9~14절에는,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후손들에게 지킬 언약으로서,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교에서는 이 전통을 이어받는다.

또, 창세기 34장에는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이후,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면 딸을 줄 수 없다고 대답하고, 거기에 응해 세겜 일가가 할례를 받은 3일 후에 고통에 고생하고 있는 중에 야곱의 두 아들(시메온, 레위)이 습격해 세겜 일가를 몰살한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당시의 할례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만큼이 며칠에 걸쳐 강한 아픔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예수의 할례

대다수의 기독교에서는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신기념일(성탄절)이므로, 8일 뒤에 할례를 행하는유다인의 관습에 의해 1월 1일이 예수가 할례를 받은 날이다. 예수가 할례를 받은 날을 "그리스도 할례축일"라고 한다.

기독교의 포교

기독교의 성립 후,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에 대하여 전도를 행할 때에, 할례를 받지 않은, 개종한 이방인에 대하여 할례를 행할 것인가 아닌가가 큰 문제가 되었다. 바오로는 "예수의 가르침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할례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지만, 교단 내에서는 할례를 해야 한다고 하는 강한 비판도 있었다.[2]

성경은 모든 신자의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 부터 하나님께서 언약의 확증을 위해 허락하신 할례는 결국 영적 할례를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는 진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다.(로마서 2:29) 그러므로 할례의 유무에 따라 신자여부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가르치는 바이다. 성경은 결코 외모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는 누군가의 학벌이나, 지위, 성별이나 인종의 차이가 구원의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없다는 기본 원칙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단, 바오로도 한편으로는 제자의 티모테오(아버지가 그리스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다)에 대하여 할례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고 한다. 만일 개종 시에 할례가 강요되었다면, 기독교의 포교방법도 상당 부분 달라있었을 것으로 보인다.(할례를 행하지 않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할례의 풍습을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이슬람교

이슬람교의 코란에는 특별한 규정은 없지만, 하디스에서 이에 대한 기재가 있다. 전설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해석은 일정하지 않지만, 이슬람교의 남아는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행하여 왔다. 시기는 태어난지 7일째에 행할 경우부터, 10~12세경까지 경우 등이 있다. 연령이 높을수록 성인으로서 예의에 가까워졌다고 여겨진다. 할례는 이발사, 수술에 익숙한 사람이 행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대개 외과의사가 행하고 있다. 할례를 행한 것을 지역적으로 축하하는 습관이 있다. 할례를 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경우는 해석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강제는 아니지만 될 수 있는 한 할례를 행하는 편이 낫다고 여겨진다.

위험성

포경시술을 받은 부위는 상처가 곪을 위험성이 있다. 특히 저항력이 없는 유아에게는 이러한 위험도가 크며, 유아 포경수술은 의사의 실수(의료사고)로 음경이 손상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데이비드 라이머와 그 가족의 사례가 유명하다.

남아프리카지역에서는 수술자가 엉터리 할례기술을 하거나 본인이 직접 할례를 하다가 부상 또는 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0대 소년들이 성인학교에 들어가 불법 포경수술을 받은 뒤에 사망한 사례도 있다. [4] 미국의 경우에는 남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극히 일부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집에서 부모가 자신의 아들에게 직접 포경수술을 시술하다 생기는 문제 때문에 폭행 혐의로 기소된 경우도 있다.

데이비드 라이머(David Reimer, 1965년 8월 22일 ~ 2004년 5월 5일)는 원치 않은 성확정 수술을 받아 여자로 자라다가 결국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남자로 다시 성전환 수술을 한 캐나다 사람이다.

데이비드 라이머는 캐나다 위니펙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브루스(Bruce)였고, 쌍둥이 동생의 이름은 브라이언(Brian)이었다. 생후 8개월 때 포경수술을 받던 중 수술에 문제가 생겨 남성 성기에 큰 손상을 입자, 부모들이 의사와 의논하여 아이를 여자아이로 성전환하였다. 특히 존스 홉킨스 병원의 성 심리학자 존 머니(John Money)의 주장은 부모들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모들은 그에게 브렌다(Brenda)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주고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브렌다 라이머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존 머니는 브렌다 라이머의 사례를 '성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뿐'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하였고 '인간은 자신의 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브렌다 라이머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큰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어려서부터 여자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길러졌으나, 남자아이처럼 행동했으며 학교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늘 받는 브렌다는 존 머니 박사의 심리상담을 주기적으로 받았으나, 브렌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존 머니는 브렌다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말괄량이 기질을 보일뿐이라며 브렌다의 문제를 일축했다.

결국 브렌다 라이머는 자신이 원래는 남자였으나 수술 후 여자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14살때 알게 되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듣자, 자신이 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며 오히려 안심했다고 한다. 브렌다는 주저없이 다시 남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남자로 성전환을 하고, 이름도 데이비드(David)로 바꾸었으나 그의 정신적 고통은 계속되었다. 결국 데이비드 라이머의 사례를 통해 ‘성 정체성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학설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밝혀졌으며, 데이비드 라이머는 자신의 사례를 널리 공개해 이런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혼 실패, 부모와 불화, 쌍둥이 동생의 자살 등으로 불우한 생을 보내다가 2004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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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 정서의 원형질이었다. 한국에는 각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 아리랑은 한국의 마음이요 한국의 역사다. 그러나 이 말의 뿌리에 대한 정설이 없다. 만주어와 관련하여 산(山)의 만주어는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이므로 이 말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퉁구스어(아리라)나 터키어(알리, 알린, 알리라)와도 일치한다. <금사(金史)>에는 만주인들이 자신의 본관을 말할 때 모(某) 산(山)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리라'는 고향(故鄕)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면 아리랑은 고향, 즉 마음의 고향(Heimat des Herzens)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2005년 한·러 유라시아 문화포럼에서 우실하 교수는 "바이칼 주변의 민족들이 '아리랑'이나 '쓰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밝혔다. "'아리랑'과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shamanism)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주1)

나아가 동호의 대표 민족인 선비족 선조들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카셴둥(?仙洞 : 알선동) 동굴에 접하여 서쪽에 있는 강 이름이 아리하(阿里河)이기도 하고, 껀허시(根河市 : G?nh? Sh?)에 있는 아룡산(阿龍山)에도 아리령(阿里嶺)이 있어, '아리랑'은 이 지역과의 관계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두 지역은 모두 현재의 네이멍구자치구(?蒙古自治?) 후룬베이얼시(呼???市) 인근에 있는데, 카셴둥은 후룬베이얼 동쪽으로 헤이룽장성에 가까운 어룬춘자치기(鄂?春自治旗) 아리허진(阿里河?)의 도시이고 아리령은 동북부, 따싱안령(大?安?) 북단 서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유적지와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따라서 '아리랑'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다. 이 말이 알타이와 그에 인접한 몽골 초원과 만주 땅(시베리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홍규 교수(서울대)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유전자와 한국인의 유전자형을 분석한 결과 70% 가량이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유전형을 보였다 … 부계(父系)를 알려주는 Y염색체의 경우 시베리아 원주민은 주로 O형, 남아시아 원주민은 CㆍD형인데 한국인은 O형과 CㆍD형이 섞여있다"며 "한국인은 북방 몽골로이드와 남방 원주민의 피가 섞여 형성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2005 한·러 유라시아 문화포럼)

한국과 몽골은 북방 그룹, 한국인의 70%는 북방계

동물지리학적 분포도(map of the terrestrial zoogeographic realm)를 보면, 한국은 북방계다. 동물지리학적 분포도는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유전자의 특성에 따라 대별한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동물지리학적 영역과 세계의 지역을 표시한 것인데, 이를 보면 한국은 중국과 달리 북방과 직접적인 연계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은 북방 그룹(Palearctic group)에 속한다.

신석기 문화를 보면, 한국인들은 알타이 ― 몽골 ― 대흥안령 ― 아무르강 ― 만주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라인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 : 빗살무늬토기 - comb marked pottery)는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거쳐 한편으로는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지나 두만강 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한반도 서북부로 유입되었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 2001) 95쪽].

한족(漢族)의 경우 허난성(河南省)의 양샤오[앙소(仰韶)]에서 최초로 채도(彩陶 : design pottery)가 발굴되었는데 채도는 주로 그리스, 이라크, 이란, 인디아의 하라빠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들의 문화가 남방에서 인디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펄쩍 뛰면서 이를 반박하고 핏대를 올리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유전형질의 측면에서도 이 점은 명확하다. 이홍규 박사(서울대)는 당뇨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중요한 연구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세포에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에너지 공장이 있고 그 에너지의 양은 그 사람의 유전형질로 결정된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형질은 대대로 유전되는데, 북방인들은 A, C, D, G, Y, Z 형 등이 많고 남방인들은 B, F, M 형 등이 많다고 하는데 이홍규 박사는 한국인들의 70%는 이 북방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방계는 대략 30% 정도 된다. 김욱 교수(단국대)는 1200여 개 이상의 유전 샘플을 조사하여 한국인들의 유전적 특성을 연구 발표하였는데, 남방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는 대체로 벼농사의 유입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남방의 유전자형이 쌀농사가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는 말이다.(주2)

고기석 교수(건국대학교 해부학교실)에 따르면, "한국과 가장 닮은 이들은 카자흐(Казах : 알타이 인근 서몽골) 민족"이라고 한다. 두개골의 구조는 인간의 기원과 동계(同系)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상으로 두개골 구조와 관련된 조사항목은 6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머리뼈의 봉합선이라든가, 구멍의 유무 등으로 두개골 연결부에 있는 구멍은 한국인들 75%가 나타나는데 이 조사를 통해보면 한국인들은 카자흐 민족(동 카자흐스탄) 즉 과거 몽골 서부지역과 동일하고 다음으로는 몽골, 부리야트(Burya-tu : 몽골의 바이칼 호수 인근에 거주) 등과 흡사하다고 한다.(주3)

한국과 몽골은 청동기 문화의 주역

북방인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었다. 중국의 양쯔강 유역에서 고도의 신석기 문화가 있었지만 그것이 청동기·철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북방에서 수혈(輸血)을 받아서 황하문명이 형성되었다. 그 동안 중국 정부는 일본과 함께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양쯔강 유역에서 청동기 유적들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면 동아시아 지역에 청동기 문화의 수혈이 어떤 방식으로 되었을까? 이것은 청동기의 유적 또는 유물 분포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신석기와 청동기의 유적 분포도를 보면, 청동기 유적의 분포가 즐문토기인의 이동로(한국인들의 이동로)와 거의 일치한다. 청동기 유적은 만리장성의 남쪽 즉 한족(漢族)의 영역에는 은허(殷墟)를 제외하고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완성품밖에 없다. 정수일 교수를 따르면 중국의 안양(安陽) 은허(殷墟) 등지에서 나타나는 청동기는 그 성형법이나 소재, 문양 등을 보건대 이미 상당히 발달한 청동기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라시아 청동기나 서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주4) 즉 은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은나라 쪽으로 수입되었다는 말이다. 만약 은나라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생했다면, 초기 청동기 흔적이나 중간 과정의 형태나 가공품들이 출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나라는 청동기의 최종 소비자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사기>에 "은나라는 오랑캐의 나라(殷曰夷)"라고 하여 은나라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한국인을 표현하는 말인 오랑캐[夷]로 나타난다.

청동기 유적 및 유물 집중 지역을 지도 위에 표시해보면, 고조선을 포함한 북방인들은 청동기의 주요 전파자였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 문명의 실질적인 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과 몽골, 눈 작고 숏다리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눈이 작고 상체가 잘 발달해있는 반면 하체가 짧다. 콧대가 상대적으로 길며, 눈썹이 진하지 않고 입술이 가늘고 콧구멍이 적다(콧구멍이 크면 북만주에서는 폐렴이 걸린다.) 이것이 대체적인 한국인의 모습인데 요즘은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바로 짧은 하체 이른바 '숏다리(short leg)'인데, 이것을 각종 언론에서는 마치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처럼 방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분명히 한국인(알타이人)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인(Koreans)의 모습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본다.

수십 년간 한국인들의 체질, 체형, 얼굴 등을 연구해온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의 특징을 매우 재미있게 묘사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무다리'이다. 즉 한국인들의 짧은 허벅지를 '조선무다리' 로 표현했는데 몽골―만주―한반도―일본에 이르는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지역 사람들의 체질(physical constitution)도 대동소이하다.

다리가 짧은 것은 춤을 안정적으로 추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래서 김연아 선수가 세계의 피겨여왕으로 등극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작아진 눈은 원거리를 쉽게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 여성 골프계를 석권하는 요소가 되었다. 양궁(洋弓)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인이나 몽골인은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였다.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주5) 현재 한국인의 신체 구조는 시베리아라는 특수한 환경에 철저히 적응할 수 있는 구조로 진화한 것이라 한다. ① 눈[目]이 작고, 털[毛]은 적고, ② 콧망울은 작지만, 코의 길이는 상대적으로 길며, ③ 치아는 크고 다리는 짧은데 허벅지 근육은 발달하였고, 두이고(頭耳高)는 세계 최고이며, ④ 미는 힘은 유럽인들의 절반 정도지만 당기는 힘이 강하고, ? 시베리아의 눈 속에서 발을 빨리 뺄 수 있도록 발꿈치가 길고, 낮은 온도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그래서 한국인들은 비교적 온도가 낮은 상태에서도 잠을 잘 잔다). 시베리아라는 특수한 환경에 철저히 적응할 수 있는 것만 중요한 사안이었으므로 한국인의 얼굴은 남녀 차이가 가장 적다.

좀 더 살펴보면, 북방계는 이빨도 큰데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세계에서 이빨이 가장 큰 민족이라고 한다. 따라서 턱도 크다. 이것은 농사나 과일 채취가 불가능하니 고기를 언 채로 씹거나 말려 먹느라 이빨이 커졌고 덩달아 턱도 커진 것이라고 한다. 코와 입술이 작은 것은 코가 길면 코끝이 커져 동상(凍傷)에 걸리기 때문이고 입술도 크면 열(熱) 손실이 많기 때문에 북방계는 입술이 작다고 한다. 또 속눈썹 길면 고드름이 달리니 시베리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북방계는 눈썹이 짧고 연하다.

북방계는 정서적으로 주로 우뇌(右腦)가 발달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목과 사냥이 중요한 업무이다 보니, 공간 감각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또 시베리아의 눈 속에서 고립될 경우에도 생존하려면, 분석적인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판단하여 직관적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른쪽 눈이 큰데, 한국인 가운데 4분의 3이 오른쪽 눈이 크다고 한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몽골인도 대부분 우뇌형인데 명분론(名分論)이 강하다. 우뇌가 극도로 발달한 사람이 바로 샤먼(shaman)이다. 한국인이나 몽골인은 뇌간(腦幹, brain stem)이 약하기 때문에 각성 수준이 낮아 이른바 '냄비근성'이 강하다. 그래서 실질적인 에너지가 약하고 수업 시간에 자주 졸거나 비즈니스도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많이 나타난다.

민족 기원에 관한 일본의 연구들

일본 학자들의 연구들을 살펴봐도 민족들의 분포 상태를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귀지(ear wax)는 젖은 귀지(습형)와 마른 귀지(건형)가 있는데 그 비율이 한국과 만주, 일본, 몽골 등이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간염의 항원(Antigen Type of Hepatitis) 분포도를 봐도,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과 만주 몽골지역, 일본 지역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과 몽골은 문화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왔고 이를 언어적으로 지지하는 이론이 알타이어족설이다. 알타이어족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한국과 몽골이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학자들은 주로 일본과 터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타이어족 이론을 대체할만한 학설은 없다.(주6)

산타페 언어연구소(Santa Fe Institute)가 만든 세계 인류 언어진화 기본지도에 따르면, 한국어는 유라시아계(인도유럽어, 우랄어, 알타이어)의 언어이며, 그 가운데서 알타이어에 속한다. 알타이어는 상당히 오래전에 터키어 · 몽골어.한국어 등으로 분화되었고, 다만 특기할 것은 한국어는 일본어와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분화된 시기가 가장 늦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어와 고대 알타이어에는 공통된 말들이 많은데 이것은 원나라와 청나라의 중국 지배에서 보듯이 북방인들이 중국을 점령·통치하는 과정에서 많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는 일부 농업 관련 단어들을 제외하고는 알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일본의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어는 북방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대륙한어(몽골, 만주어) → 반도한어(한국어) → 열도한어(일본어) 등으로 분류하였다. 대부분의 일본어는 한국어를 어근으로 하는데 5천여 개의 유사한 단어가 있다고 한다. 대륙한어는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반도한어 → 열도 한어가 되었다는 것이다.(주7)

한국어는 원알타이어(Proto Altaic language)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말 가운데 순수한 고유어들은 대개는 알타이어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벼농사에 관한 말들을 제외하고 대개의 지형이나 각종 고유 동사, 형용사들은 알타이어를 기원으로 하는 말들이 많다. 가령 '나라'로 발전한 어휘인 골, 굴 등이라든가 한국인들의 나라 이름과 직접 관련이 있는 구리(까우리, 꾸리), 왕(king), 곰(bear), 검다(black) 등의 어휘인 곰, 감, 검 등은 알타이어다. 이 부분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비교언어학자인 세르게이 스타로스틴(Серге?й Анато?льевич Ста?ростин, 1953~2005) 박사의 연구를 통하여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주8)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보면, 한국말의 '불(fire)', 새벽을 의미하는 한국 고대어 '배', '태우다(burn)', 뿌리(root), 빨갛다(red), 볕 또는 빛(light), 별(star), 벼리(그물의 중심) 등은 대부분 원알타이어(Proto-Altaic)와 일치한다. 특히 한국에서 넓은 평원(field, plain)을 의미하는 '벌[平原]'은 원알타이어인 p`??la? [팔라](의미 : field, level ground), 만주어의 p?la-n[팔란], 일본어의 pa?ra[파라]? 등과 거의 일치한다.(주9)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국어와 알타이어(한국어,일본어,만주어,몽골어,터키어)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어에는 성조(聲調)가 있는데 알타이어에는 성조가 없다. 성조가 있거나 복잡한 언어들은 대부분 남반구의 더운 나라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따라서 중국문화는 한국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만리장성 이북의 언어들은 현대의 중국어와 같은 현란한 성조가 없다.

그렇다면 알타이를 기점으로 하여 한반도 일본에 이르는 이 민족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은 없다. 필자는 그동안 민족의 이동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서 알타이人 또는 쥬신(Jushin 또는 Jusin)이라는 용어가 적합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한국인(Korean)이라는 말보다는 한국인들(Koreans)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점도 지적한 바 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말은 '가라' 또는 '가야'와 같이 '칸(한)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에 이 말은 보통명사로 굳이 한반도에서만 사용해온 용어가 아니라 몽골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 말이기 때문이다.(주10)

알타이와 몽골 초원은 한국인들의 마음의 고향

알타이는 영원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다. 알타이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운 <콩쥐팥쥐>, <우렁각시>, <혹부리영감>,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등의 원고향이다. 헝가리 평원과 극동지역에서 크게 원을 그리면 그 원은 알타이 산에서 만나게 된다. 알타이와 몽골 초원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어머니 대지이며 한국인들의 문화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한국인들은 하늘에서 큰 나무를 타고 알타이 산으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늘과 우리를 이어주는 큰새, 태양의 새 삼족오(三足烏) 까마귀, 사슴, 나무, 산, 황금을 우리는 신성시하는 것이다.

기마민족들은 큰 새, 큰 나무, 사슴 등의 세 가지의 상징이 있다. 사슴은 대지(good earth)를, 자작나무는 세계의 축으로 천상과 지상을 잇는 동아줄을 의미한다. 알타이人들은 하늘로부터 이 나무를 타고 산으로 내려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큰새는 하늘의 사신이니 알타이人들이 죽으면, 이 새를 따라 다시 칠성님(북두칠성) 즉 하늘로 돌아간다. 이 세 가지의 상징이 황금으로 통합되어 영원한 형상을 가진 것이 바로 신라의 금관(金冠)이다. 이것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한다.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기마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다.(주11)

'알타이人의 아버지 탄자강'은 황금 개구리왕[금와왕(金蛙王)] 탄자강이 알타이人의 시조로 나오는 설화다. 그런데 이 금와왕은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분이다. 즉 부여와 고구려가 바로 이 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주12) <삼국지>에 따르면,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가 되는 나라는 고리(?離 : 까우리)국 즉 원 코리아(Proto-Korea)로 기록상 최초로 나타나는 코리어(Korea)이다. 따라서 고리국은 알타이 지방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한국(Korea)은 바로 알타이라는 말이다.

알타이의 최고봉인 벨루카 봉으로 가는 길은 한국의 성황당과 흡사한 <세르게>(몽골의 오웨)가 곳곳에 있다. 산에서 흐르는 강에는 돌을 쌓아둔 것도 많아서 한국의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벨루카는 "언제 어디서나 정상의 하얀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태백산(太白山)이요 장백산(長白山)이다. 그러니까 알타이산은 한국인들의 제1 주산이고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간 것이 한반도 북부의 장백산(백두산)이다. 필자는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욕설에 가까운 말이니 사용하지 말고 장백산은 원래는 만주인들의 용어였으나 현재는 중국인들의 용어로 굳어진 관계로 태백산(太白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한 바 있다.(주13)

원래 알타이는 몽골의 영역이다. 현재 알타이 지역은 몽골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맞닿은 지역이다. 카자흐人들도 서부 몽골인인데, 세월이 흘러 카자흐人은 투르크와 몽골의 중간쯤 되었다고 보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 이 지역에 아사달(阿斯達)이라는 말이 살아있다. 알타이어에는 알타이 시라(sira 또는 te?ga : 山의 뜻), 알탄시라, 알탄테가, 아사타라 등의 말이 살아있는데 이 말은 한국인을 나타내는 아사달 (주14) 등과 직접 관련이 있다. 다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사달이라는 말의 문헌적 연계가 고대 수필집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관련 정사(正史) 문헌을 찾아내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현재 수도는 아스타나(Astana)인데 이 말은 아사달(아스타라)와 같은 의미다. 즉 아사달은 한국인들의 최초의 수도로 기록된 곳으로 그 의미는 '태양이 비치는 밝은 벌판(또는 높지 않은 산)'으로 '도읍지(Capital)' 또는 '신성한 땅(Holy City)'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알타이어로 볼 때, 아스(아사)는 '밝게 비치는(불타는 : lightly burning)', 타라(타르)는 '약간의 언덕지역 또는 낮은 산'을 의미한다.

이상을 보면, 한국과 몽골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부정할 수 없고 현대에서도 한국과 몽골이 특히 가까운 것은 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려시대 집중적으로 한국과 몽골의 혈연이 융합된 것이 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본문 주석

(주1) 연합뉴스 : 2005.08.14

(주2) KBS 1TV 2004 <위대한 여정 한국어> 제1부

(주3) 카자흐민족은 투르크의 일파로 알타이, 카자흐스탄, 중국 서부에 거주한다 ☞ 관련 자료 : KBS 몽골리안 루트 6 황금가지(2001년 2월 방영)

(주4)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2002) 70쪽.

(주5) 이하의 서술은 조용진 <얼굴> (사계절, 1999) 참고. 또 위의 내용의 일부는 필자가 조용진 선생으로부터 직접 인터뷰한 내용임.

(주6) 이성규 「광물이름의 비교를 통한 알타이어족 분화시기 연구」<몽골학 27호> (한국몽골학회, 2010)

(주7) 시미즈기요시.박명미 <아나타(あなた)는 한국인> (정신세계사 : 2004)

(주8) 세르게이 스타로스틴(러시아 주립대학 인문학 연구소 소장) 박사는 러시아 비교언어학파의 수장으로 인간 언어의 진화를 연구한 바벨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안타깝게도 2005년 심장마비로 급서하였다. 인터넷상에서 바벨프로젝트인 스타로스틴 DB를 볼 수 있다. 바벨 프로젝트 DB 중 알타이 계열어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http://starling.rinet.ru → Click here to start(바벨탑 사진 하단) → All Databases → Altaic etymology (Compiled by Sergei Starostin)에서 view |query | description 가운데 query 를 클릭 → View All Records

(주9) 여명기의 한국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많이 등장하는 말로 조선, 쥬신, 숙신 등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맥(貊), 박(?), 발(發), 백(白), 불(不) 등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 말들은 '불(fire : 火)'을 의미하거나 '밝다(light)', 홍익인간(弘益人間) 등의 의미로 태양(Sun) 또는 하늘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표현하는 말이고, 이것이 민족의 이름으로 정착되어간 것이다. 부여(夫餘)라는 말도 이 말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에 있어서 조선(朝鮮)이라는 말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스타로스틴 DB로 알 수 있다.

한국어의 '밝(? : 밝다)'에 해당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발(發), 맥(貊), 또는 단(檀) 등으로 나나타고 있는데, 이 말은 샤먼을 의미하는 박시(Baqsi)와 연계되어있다. 따라서 發조선이란 貊조선, 檀君조선이라는 말과도 큰 차이가 없다. 다만 檀은 박달나무와는 큰 상관이 없고 '밝달' 또는 '배달(태양이 비치는산 또는 태양족)'을 표현하는 말이다. "bright, to shine"의 의미로 Proto 알타이는 [먈릭 mi?ali(-k`V)]이고 투르크어는 [밝 bAlk] 몽골어는 [멜 mel] 만주 퉁구스어는 [먀ㄹmia(l)]이고 한국어에서는 [맑다 ma??rk]에서의 '맑'과 같다. 결국 '맥'과 '밝'은 서로 호환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1. 아리랑의 명칭

한국의 대표적 민요의 하나.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들어 있는 구전민요이며 가장 널리 애창되고 있다. 아리랑은 대체로 3음보와 세마치장단으로 이루어진 서정민요이며 시형식은 2행시로 되어 있어 간결하다. 특정한 생활상의 기능을 가진 민요는 아니지만 민중생활의 순간순간의 비애와 애환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말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적 감정과 울분을 호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근대 민요의 역할을 하였다.



2. 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크게 고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과 대원군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아리랑은 고대에 성립되어 차츰 변형이 이루어져 대원군 시대에 들어와 경복궁 공사를 위한 가렴주구가 얽혀서 여러 변이형이 생기고 내용상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리랑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에 대해서도 그 유래에 관한 많은 논란이 있다. 아랑설(阿娘說)·알영설(閼英說)·알영고개설을 비롯하여 대원군시대를 유래의 시점으로 보는 아이롱설(我耳聾說)·아난리설(我難離說)·아리랑설(我離娘說)·아랑위설(兒郞偉說) 등이 있다. 이 밖에 양주동(梁柱東)이나 이병도 등의 학자에 의해 아리랑이 옛 지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아리랑의 성립시기나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정설은 없다. 이러한 설들은 아리랑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된 것이다. 그러나 《닐늬리》 《청산별곡》 《군마대왕(軍馬大王)》의 후렴구처럼 아리랑도 관악기의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설이다.



3. 아리랑의 종류

경기도지방의 아리랑이 전국에 전파되면서 아리랑에는 많은 변이형이 생겨났다.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등이 있다. 《경기아리랑》은 《서울아리랑》이라고도 하며 《신민요아리랑》 또는 《신아리랑》으로 분류된다. 또한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최근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지어 부르는 교포아리랑도 있는데 《독립군아리랑》 《연변(延邊)아리랑》이 그 예이다. 《정선아리랑》은 <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